LEE BUL: PRINTS

<Untitled – SF>(2024) 연작 역시, 이불의 주요 설치 작품인 <Souterrain>(2012/2016)의 주제와 시각적 요소가 바탕이 되었다. 수천 개의 거울 조각으로 이루어진 이 설치 작품은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린 인류사의 흥망성쇠를 하나의 아방가르드적 건축 구조로 구현시켰다. ‘Souterrain’ 은 지하 구조를 일컫는 단어인데, 작품 역시 어두운 터널과 같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. 미래적 비전을 떠올리게 하는 메탈릭한 외부와 대비되는 작품의 내부는 제한된 빛과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구조를 통해 관객에게 극적인 공감각을 선사한다. 이러한 인지적 감각은 판화에서 여러 형태로 파편화된 패턴과 홀로그램, 금속박의 겹침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. 깨어진 시공간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 시리즈는 세밀하게 교차시킨 다양한 레이어와 색감들로 서로 유사한 듯 전혀 다른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낸다.

과거에서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적 개념의 차용과 여러 겹의 층위와 이질적 재료의 혼용은 작가의 대표적인 평면 작품 <Perdu>(2016—)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. <Perdu>가 조각적으로 접근한 입체적 회화라면 이 판화 연작은 삼차원의 공간을 한 장의 지면 위에 고도로 압축시킨 섬세한 종이 작업이다.

이러한 세밀함은 <Untitled – SI>(2023)와 <Untitled – PI>(2023)에서 더욱 두드러진다. 두 시리즈는 작가가 STPI에서 레지던시 기간 중 제작한 드로잉과 콜라주를 바탕으로 했다. <Untitled – PI>는 부드러운 색감의 조합으로 인해 언뜻, 꿈속의 환상적 풍경을 그려낸 듯 보이지만 실제 핵폭발의 버섯구름과 실패한 모더니즘의 서사에 등장하는 기계적 구조의 실루엣을 지니고 있다.  <Untitled – PI>의 옅은 파스텔 톤과는 상반된 단색의 어두운 철 가루를 사용한 <Untitled – SI>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녹슬어가는 철의 재료적 특성과 수없이 반복되어온 과거의 역사적 시간을 연결 지어 오늘의 현실을 비유하려는 듯 보인다. 새로운 판화적 기법을 활용한 작품들과 달리, 전통적인 에칭 기법을 충실히 따른 <Untitled – WE>는 일련의 신작이 포착한 디스토피아적 풍경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제플린 비행선의 모습을 담았다. 이 물체는 작가의 또 다른 주요 조각 설치 작품인 <Willing to be vulnerable - Metalized Balloon>(2015—)에 등장하는 힌덴부르크 비행선으로 이불의 작품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진보주의적 프로젝트의 신념을 표현하는 동시에, 인간이 만들어내는 필연적   오류와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징한다.

이렇게 주요 조각 작품과 그 세계를 밀접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불의 판화는 전통적인 인쇄 기술과 종이 매체를 통해 모더니즘의 극적인 시대상과 예술, 과학 및 기술의 융합을 탐색한다. 과거와 미래의 기술이 집약된 다양한 기법적 활용이 돋보이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끊임없는 탐구 의식을 엿보게 하며 앞으로도 이어질 새로운 시각적, 재료적 실험과 매체의 확장을 기대하게 한다.